만약 수필을 소개하는 글을 쓸 때 머리말을 다는 것이 어렵게 생각된다면, 시집의 전주곡으로 서문이 되어야 한다고 했을 때 시집에 머리말을 다는 것은 더 어려운 일일 것이다. 작가의 투영에 도달하거나 감정의 변화 그리고 시 작품을 꾸미고 있는 생각의 흐름을 알아내는 것은 쉽지 않다. 텍스트는 독자와의 공통 분모를 찾기 위해 그 속 내부를 드러내는 것이다. 마음의 목소리를 리듬과 함께 보여주는 시인은 더 깊은 곳으로부터 자신을 표현한다. 그리고 소중한 그의 마음 속, 세상을 보여준다. 이런 의미에서, 시를 짓는 것은 노출의 행위이고 고통의 움직임이다. 왜냐하면 시인들은 잘 알지 못하는 독자 앞에서 자신을 노출 해야 하기 때문이다.
텍스트를 읽는 독자들은 시인 내부 안의 감정과 동일시되는 강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독자들이 이런 기분을 느꼈을 때, 시는 우리들 개인 유물의 한 부분을 형성하면서 끝이 나고 만다. 그리고 자기 본위의 창이 되기 위해 지적이고 문학적인 존재가 되는 것을 과감히 버린다. 시인들은 우리 스스로 존재의 깊이를 느끼는 감정보다 우리들을 더 잘 표현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 우리의 인상, 우리의 느낌 그리고 우리의 감정을 글로 풀어 써낸다.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우리 자신보다 더 완벽하게 표현한다. 비록 우리가 모든 것을 말하지 않더라도 우리가 말하려고 하는 것을 더 완벽하게 말하도록 도와준다. 왜냐하면 언어는 인간 경험의 광대함을 억누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시인들은 언어에 대한, 이미지를 유연하게 바꾸는 그리고 작품이 원하는 조화를 갖추기 위한 리듬을 탈 줄 아는 재능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비록 이런 과정에 항상 암초가 도사리고 있다 할 지라도, 시는 우리들에게 타인의 주관적인 심해로 빠져들 수 있게 허락한다. 어떤 사람이 시인의 생각을 받아드릴 준비를 했을 때, 시의 본질적인 것을 보지 못할 가능성과 정확하지 않게 작품을 해석할 가능성은 항상 존재한다. 그렇지만, 그 과정의 노력은 가치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각각의 본문은 쉽게 해석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숨기고 있고 독자들은 시 속에서 자신에게 맞는 개인적인 발견을 하기 때문이다. 시를 읽는 것은 돌아오지 않는 여행을 떠나는 것과 같다. 어디까지 갈 것인지 모르고 여행의 끝이 어떻게 될지도 모른다. 항상 편안한 여행이 되진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보지 못하는 존재의 범위와 우리들 본위의 범위를 발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인은 우리 삶 속에 있는 아름다운 것만을 보여주지 않고 그것의 어두운 면 그리고 부족한 면 역시 보여준다. 그러므로, 시를 읽는 것은 영혼의 확고한 능력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작가는 그 스스로 대면할 수 있는 준비를 항상 갖추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고 세상의 제한도 없기 때문이다.
독자가 손에 들고 있는 이 책의 시인은 나에게 시 작품에 머리글을 써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그 부탁에 감사하기도 하고 조금은 두렵기도 한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마넬 케랄트의 서술적 시를 평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초입에, 다른 텍스트 안에서 이미 성공한 세상, 인간 그리고 인간의 존재에 대한 개념을 표현했던 (그 개념은 독자에게 생각의 시, 중심, 목적과 같은 것을 지니는 시를 선물하고 독자에게 생각을 강요하며 알지 못하는 장소까지 그를 인도한다 또 그 안에서 생각의 행동을 달래기를 강요한다.) 원숙한 시인 앞에 우리들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지적으로 순수한 시를 다루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비록 철학적인 개념 안에서 그것이 풍부하다고 할 지라도, - 함축적인 형이상학으로 가득 차 있다 – 그것은 독자의 마음을 감동시키거나 그 안에서 앞서 정의하기 어려운 용기의 상태를 자극하는 열정의 강렬한 시이기 때문이다. 일상생활의 리듬 안에서 변화를 경험할 준비가 안된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준비가 안 된 사람은 이 시를 읽지 않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그의 시는 이데아의 급류이자 그에 접근하는 독자에게 새로운 것을 주는 감정의 급류이기 때문이다.
읽고 잊혀지는 시인이 있다. 그러나 읽고 더 이상 잊혀질 수 없는 시인이 있다. 그것은 우리들의 영혼의 건반을 두드렸기 때문만이 아니라, 마음 속으로부터 우리들을 감동시키고 우리들을 노천 한가운데로 데려다 놓았기 때문이다. 마넬 케랄트는 시인의 혈통을 유지한다. 그러므로 이 책에서 발견할 것은 철학적 시, 개인적 발견의 장편시, 정직한 연구 그리고 동시에 인간상태의 미숙함이라는 주의 사항들을 독자에게 보내도록 나를 허락한다.
나는 그가 우리에게 선물한 시 속에서 아주 아름답게 표현하는 다른 방법을 말하지 않을 것이고 역시 그것의 능력도 말하지 않을 것이다. 대신 나는 책으로 출판되기 이전에 시를 읽는 특권을 갖는 독자의 시각으로서 우리들에게 보여주는 토대를 탐험한다. 결론적으로, 서문의 목적은 작품에 머리글을 다는 것이 아니라 작품을 읽게 만들고 작품을 읽게 하는 의지를 주고, 그들의 손에 쥐고 있는 책의 가치를 독자들에게 내 보여주는 것이다. 좋게 말하면 그 작품을 받아들이게 그리고 작품에 대해 의의를 갖지 않게 하는 것이다. 만약 이 서문이 그런 결론을 얻게 된다면 나는 만족할 것이다. 왜냐하면 내 생각에 이 작품은 그럴만한 충분한 가치를 지니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사회는 이런 시 종류로 풍족해 지지는 않는다. 시는 빈번하게 이야기를 아름답게 미화시키기 위해 그리고 사회적인 행위를 아름답게 꾸미기 위해 사용된다. 그러나 케랄트의 시는 이런 결론을 따르지 않는다.
실존의 깊은 어조를 지니고 있는 그의 시는 결말에서 살아있는 고뇌로 하이데거 보다 더 하이데거 풍으로 다시 태어난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의 삶보다 더 의심스럽고 더 어두운 측면으로 묘사된다. 시인은 무의미한 것 앞에서 그리고 우리가 보내는 시간은 지나간 시간이고 우리는 고인을 위한 존재라는 증명 앞에서 고뇌의 생활을 리듬감 있게 표현한다. 케랄트는 허공의 경험 앞에 대면한다. 이런 경험의 냉혹함을 숨기지 않고 고독한 행보를 하게 끔 독자들을 초대한다. 내 생각에 시인은 공범자를 그리고 같은 목소리의 같은 경험을 나눌 친구를 찾는 것 같다.
허공 속 절벽은 정신산란, 사회로부터의 도주, 유희 속에서의 산란을 유발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영구적으로 방종함을 유지시키고, 의미 없는 사건과 소식으로부터 혼돈을 유발하며 변화하는 세상이다. 이런 세상에 우리들은 강한 메커니즘을 사용하고 있다. 시는 빈번하게 이런 기능을 대체한다. 그러나 케랄트의 시는 그렇지 않다.
케랄트는 우리들에게 허공의 공포 앞에서 경작을 하게 한다. 그리고 절벽의 끝에서 우리들이 어디 있는지 우리들이 누구인지 그리고 우리들의 삶에 어떤 의미를 주는지 생각하도록 우리들을 혼자 두고 떠난다. 소음과 마취의 메시지로 가득 차있는 문화 속에서 케랄트의 시는 명확하게 문화에 반대하고 있다. 그 이유는 그의 시가 경솔함의 토대로 퍼지지 않고 실존의 무게, 사회의 광대한 토대로 퍼지고 있기 때문이다. 포스트 모던 독자가 작품의 주인공인 바꾸의 드라마를 바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만약 그런 현상이 일어났다면 그것은 시인 때문이 아니라 시인과 세상 사이에 존재하는 경험의 차이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확언컨대 어떤 독자들은 비통함, 바꾸가 죽은 허공을 맛 보게 될 것이다. 마넬 케랄트가 만들어낸 세상과 함께 동질성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이런 것을 봤을 때 케랄트의 시는 ‘멀리 항해하도록 준비된 그리고 심해의 형이상학으로 빠져들 준비가 된 독자들에게 강요 된다’ 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이 우리들 이기도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하게 만든다. 넓게 유포된 악이 우리들을 압도하는 세상 속에 우리들은 존재한다. 케랄트의 모든 시의 중심이 되는 빈곤함의 경험을 우리들은 경험한다. 모든 것의 소멸, 시간의 냉혹한 흐름, 세상의 우연성 그리고 사람의 우연성, 자신의 나약함 그리고 그와 연관되는 나약함은 시적 선택의 중심 문제이다. 모든 것은 케랄트의 세상 속에서 허망한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존재는 이러한 우연성으로 꾸며져 완벽하게 살지 못하고 불편한 감정을 마음 깊숙이 느끼게 한다. 기다리지 못함, 질문에 대한 대답, 확실한 표시, 이런 모든 것의 의미를 찾는다. 밀란 쿤데라의 작품을 빌려 말하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경험은 육체의 종류가 아닌 형이상학적 특징의 종류인 고통으로 발전한다. 케랄트의 시에서 고통은 인간 존재의 납골당의 열쇠로 변한다. 무엇이 존재를 정당화하는가에 대해, 그리고 주인공 바꾸가 계속하길 원했던 것, 그 존재 속에서 살아 가기 위한 싸움을 하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가에 대해 시인은 자문한다.
바꾸는 그의 공허함에 책임감으로 마주치는 인간의 전형이다. 그리고 교묘히 헤쳐 나가는 장소에서 자신의 존재를 정당화하는 이유와 허무주의의 유혹을 뒷받침하는 이유를 자포자기적으로 찾는다. 케랄트는 시의 중심선에서 정의에 대한 철학적 질문을 이렇게 던지고 있다. 충족한 삶을 사는 것은 무엇인가?
바꾸는 약하고, 결점이 있고, 고통으로 고문 받는 존재 그리고 그것들과 유사한 흐리고 멀리 떨어져 있는 방향을 읽은 어떤 것의 거대한 미궁 속 인물이다. 시인은 우리에게 공허의 창을 여는 것을 강요하고 우리가 자주 보는 것으로부터 더 멀리 보게 하며 우리들 존재의 뿌리에서 가라앉게 만든다. 바꾸의 존재는 영생으로부터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고 더 심오한 공허로부터 사랑한 영원한 존재 ‘신’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케랄트의 시에서 골고다의 언덕(Golgota) 과 같은 확고한 의미를 발견하진 못한다. 그렇다 그것은 마지막 자유의 여정인 공허를 받아들이라고 우리들에게 말하는 것이다.
길게 쓰여진 시에서 작가는 서정을 표현하고 라틴작가들이 자신에게 닥친 공백의 공포감(Horror vacui)이라고 말하던 공허의 경험을 표현한다. 시의 중심 인물인 바꾸는 아마도 시인의 높은 자기본위(Alto ego)이고 그 인물은 심연의 곳곳을 돌아다닌다. 그리고 우리들에게 이런 경험과 마주치는 고통을 보여준다.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가능한 용해, 다른 것들과의 단절, 고독의 생활, 경험, 광대하게 퍼진 악 앞에서의 무기력함 이런 것들은 케랄트의 시 속에서 다양하게 나오는 것들이다. 이것은 독자가 할 수 있다는 증거도 되고 시인의 세계를 보는 방법을 함께 할 수 없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케랄트가 우리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우리들을 더 깊이 생각하게 만드는 다양한 선물을 준다는 것을 다시 한번 인식할 수 있다. 이런 모티브로서, 책 속에 포함하고 있는 시는 이미 커다란 가치를 지니고 있다.
많은 질문을 던지는 시인, 이것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리들에게 고통을 주는 시인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는 우리들에게 감동을 선사한다. “심각한 문제를 알지 못한다. 어떤 것도 말할 수 없다.”. 마넬 케랄트의 시는 조형의 커다란 아름다움을 제외하고 형이상학적인 강력한 힘을 지닌다. 표면적인 한 면에서 움직이는 것을 제외하고 존재의 중대한 질문과 함께 독자에게 서서히 다가간다. 이런 의미에서, 아무 생각 없이 달콤한 꿈을 꾸고 있는 우리들을 자극시킨다.
존경하는 독자들이여, 우리들에게 주어진 너무나도 상냥한 케랄트의 시를 음미해 봤으면 한다. 모든 것은 진실을 통해 열정, 정직함, 성실함이 배어 나온다. 주의를 기울였으면 한다. 특히, 듣는 태도를 강요하고 싶다. 그의 목소리를 상세히 알리기 위해 우리는 우리의 마음속에서 공명하는 목소리들을 침묵시키는 노력과, 수용하는 태도를 받아들이려는 노력, 텍스트로부터 넋을 잃지 않게 하는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독자들이여 좋은 여행이 되길 바란다!